· 고려대학교 서울캠퍼스 자연계 하나스퀘어 _02
· 시월 넷째 주 노동요 선곡표
· 오후 세 시, 그때 그는 다방에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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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주로술을마시고때때로작업을읽는다 _09 ]
고려대학교 서울캠퍼스 자연계 하나스퀘어 _02
조경은 어떻게 시간을 관통貫通하는가 | 세 개의 정원
대기4 大氣
「2」 『지구』 천체天體의 표면을 둘러싸고 있는 기체.
사물10 事物
「2」 물질세계에 있는 모든 구체적이며 개별적인 존재를 통틀어 이르는 말. 1)
경관을 찾고 만드는 조경에서 시간은 대기大氣의 시간과 사물事物의 시간이란 두 층위를 내재하며 이것이 교차하고 중첩하면서 풍경을 짓는다. 대기의 시간은 하나의 장소가 가진 경관이 지구의 공전과 자전, 달의 주기 그리고 대기의 변화에 따라 다른 빛깔과 질감으로 드러나며 우리의 감각이 닿는 자리에서 만들어지는 풍경이다. 아침의 투명과 저녁의 모호模糊, 동틀 녘의 붉은 미열과 해거름의 자색紫色 온기, 밤의 희미한 고요와 한낮의 희끄무레한 소음, 그믐밤 칠흑의 적막寂寞과 보름의 둥근 충만, 봄의 환하고 옅은 욕망과 가을의 노오란 쇠락, 여름 신록의 청동빛 권태와 겨울의 하얀 광기狂氣, 소리를 지우고 풍경이 되는 비와 모든 소리를 묻어 풍경을 드러내는 눈, 지워진 풍경 속 상실喪失의 마음 한가운데로 우리를 놓아두는 안개와 눈 닿는 데까지 우리를 데려가 풍경을 펼치는 청명淸明, 흔들리고 흔들리면서 어디로든 갈 수 있는 풍경이 되는 바람과 물 알갱이 하나마다 내음을 담고 있는 습기濕氣의 감각으로만 그려지는 풍경은 사물이 놓인 땅과 사물을 둘러싼 대기가 펼치는 시간의 경관이다.
모든 사물은 저마다 생애 주기生涯週期를 가지고 한동안 물질세계를 살다 사라진다. 이것을 사물의 시간이라 한다면 경관은 이러한 사물이 가진 서로 다른 시간이 만나는 순간이고 그 풍경은 시간에 따라 매번 조금씩만 달라지며 그렇다고 같은 풍경으로 돌아온 적은 없다. 지질학적 시간을 갖는 돌의 풍화風化와 녹슬어 가는 벼린 쇠腐蝕, 나무가 살았던 시간보다 짧게 살다가는 목재의 부패腐敗, 빠르게 변색하고 조금 느리게 삭는 콘크리트, 점점 불투명해지는 유리와 빛바랜 물감의 잃어버린 생기가 사물이 가진 시간의 한 단면이다. 이와 다르게 나선의 궤적을 그리는 나무의 시간은 하나의 나무가 오롯한 자신만의 시간을 살면서 또한 어울려 숲이라는 군집의 시간으로 거듭난다. 이 나무가 오래도록 그곳에 살다가 고사목으로 스러져 뭍 생물을 키워 온전히 썩어 사라질 때까지 나무라는 사물의 시간이라 해야겠다. 풀은 해를 기준으로 나누어 한해살이풀과 여러해살이풀로 나뉘지만, 그것이 가진 각각의 색과 질감, 내음과 형상은 바람의 모습을 드러내고 나비와 벌을 부르며 끝없이 풍경을 바꾼다. 그러나 선태류와 해조류의 시간은 인간이 가늠할 수 없다. 이렇게 조경에서 호명하는 사물의 회류回流하는 역동적 경관은 언제나 일상의 사건이 되고 무지막지無知莫知한 경이驚異다.
이 두 층위의 시간이 만드는 풍경에 인간의 시간이 겹치면서 우리가 말하는 경관이 찾아지거나 만들어진다. 지극히 변덕스럽고 단속적斷續的인 인간의 시간은 두 개의 시간과 조화를 이루었다기보다 철저하게 인간의 관점에서 시간을 재단裁斷하여 왔다. 심지어 인간 자신의 시간까지. 서구와 달리 자연과 인간이 분리되지 않은 하나의 세계 속에 놓고 사고하였던 동양의 정원도 예외는 아니다. 오늘날과 다르게 문화적 한계와 사회적 조건이 단순하였던 조경의 역사가 시작되기 이전 정원 역사에서 시간은 훨씬 명료하다. 그리고 같은 문화권으로 묶을 수 있는 중국과 일본, 한국의 정원을 놓고 보면 확연히 다른 시간에 관한 인식이 정원 양식으로 드러난다.
중국 베이징의 이화원頤和園2)은 약 300ha로 인공 호수인 곤명호昆明湖와 절과 궁전이 있는 만수산萬壽山으로 이루어져 규모와 시설이 인지의 크기를 넘어선다. 끝이 보이지 않는 호수와 길고 긴 장랑長廊은 나아갈수록 도착이 미뤄지면서 시간을 한없이 연장한다. 솟아 늘어선 건물과 사이 공간은 곤명호와 비교하면 작지만 다가가면 압도적인 규모와 포치鋪置로 사람을 지우고 공간과 사물에 관한 우리의 감각을 전이시켜 지금의 시간을 무화시킨다. 공간의 규모가 시간의 길이를 말하는 것은 아니지만, 자연이 가진 거대한 축척의 한계까지 다가감으로써 감각을 넘어선 공간의 규모는 우리를 아주 멀리 천천히 흐르는 시간 속으로 밀어 넣는다. 그래서 이화원은 끝날 것 같지 않은 연장된 시간, 영원에 관한 알레고리다.
일본 교토의 용안사龍安寺 석정石庭2)은 평정고산수平庭枯山水 수법의 최고 경지로 알려져 있다. 가로 약 25m, 세로 약 10m의 248m2의 정원은 한 그루의 나무도 풀 한 포기도 없이 돌과 왕모래, 이끼만으로 만들어진 정원이다. 중국의 이화원과 비교할 수 없는 티끌 크기의 정원은 그러나 완강하게 담장을 둘러쳐 외부를 차단해 물리적 공간을 한정하였으나, 열다섯 개의 돌을 놓고 하나를 숨김으로써 내부로 끝없이 확장하는 공간을 만들었다. 여기에 지상 식물 역사 전체를 거슬러 오르는 이끼를 심어 정원을 지질학적 시간 속에 놓는다. 짧은 인간의 삶으로 보면 영원에 가깝다. 그러나 이것은 대기의 시간이 가진 변화와 무관하게 모든 변화를 통제하여 시간을 소거함으로써 제행무상諸行無常의 역설적 어법으로 한없는 무無로 향하는 관념의 경관이다.
한국 서울의 창덕궁昌德宮 후원後苑은 조선조 오백 년 동안 만들고 허물어지기를 반복한 언제고 하나의 모습으로 완성되지 않은 그래서 매 순간 완성된 모습이었던, 지금 쇠락한 모습까지도 그대로 그것 자체인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정원으로 남겨졌다. 후원이 경영된 방식도 그러하지만, 후원의 형식과 모습 또한 주어진 자연에 순응해 그 공간의 규모를 벗어나지 않으면서 당堂과 정亭이 방지方池와 함께 뜰과 계곡 사이사이 넓게 펼쳐져 있다. 더욱이 후원은 단순한 정원의 기능만 한 것이 아니라 종사宗社를 보는 궁궐의 업무 공간이었으며 습진習陣과 사례射禮를 하던 군사 훈련장이었다. 그래서 창덕궁 후원은 시간을 어떠한 방식으로든 통제하여 다른 무엇을 상상케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순간의 시간이 풍경으로 고스란히 드러나는 철저한 현시顯示의 경관이다. 그래서 후원의 경관은 어느 한순간 똑같은 것이 없고 시간이 그러하듯 끝없이 변한다.
한없이 시간을 연장하여 영원에 관한 욕망을 숨기지 않은 이화원과 모든 시간을 소거하고 인간 자신의 시간마저 지워 완성한 용안사 석정, 시간 자체를 끝없이 변하는 경관으로 받아들여 매 순간 완성되고 매 순간 변하는 창덕궁 후원은 조경에서 인간이 시간을 어떻게 인식하고 통제하였는지 선연鮮然히 보여준다. 통제하지 않는 것까지 통제의 한 방식이란 사실을 염두에 둔다면 말이다. 이렇게 대기의 시간과 사물의 시간이 만드는 풍경에 통제統制와 방임放任을 오가는 인간의 시간으로 만들어지는 경관을 두고 '조경은 어떻게 시간을 관통하는가.'라는 질문은 마땅한 물음인지 의심스럽다. 시간을 두고 우리는 '어떻게'에 초점을 맞추겠지만, 여기서 '관통'이라는 낱말이 데려가는 '조경'은 지극히 한정된 의미의 협소한 조경으로 보인다. 어쩌면 조경은 학교에서 가르치고 우리, 일반이 알고 있는 그것과 전혀 다른 것일지 모른다. 조경의 역사보다 오래된 정원은 그렇다 치더라도 20세기 후반 이후 조경은 하나의 가치 그리고 어떤 하나의 완성된 모습으로 완결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가치와 지속적인 행위로서 존재하는 것은 아닌가.4) 그랬을 때 설계와 준공 직후의 공원도 모두 지속적인 시간 속에 아니 시간 그 자체로 완결이 아닌 끝없는 변화를 통해서만 완결될 수 없는 완결을 향해가는 행위라 규정할 수 있겠다. 그러니 다시 물어야 한다. '조경은 어떻게 시간의 흐름 속에 놓이는가.'
_2026. 10.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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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은 어떻게 시간의 흐름 속에 놓이는가 | 두 개의 데크
하나스퀘어를 들여다보면서 물었던 '조경은 어떻게 시간을 관통할 것인가.' 라는 질문은 그래서 '조경은 어떻게 시간의 흐름 속에 놓이는가' 로 바뀐다. 대부분의 조경 공간이 그러하듯 하나스퀘어는 2006년 준공된 이후로 현상을 유지하기 위한 관리는 있었지만, 의미 있는 조경 행위는 없었다. 의도된 방임이 아닌 소극적 방치는 대기와 사물의 시간이 스스로 경관을 짓는다고 하여도 조경이라 이름할 수 없고, 인간의 이기만을 위한 편의를 중심에 둔 관리 또한 조경이라 할 수 없다. 언젠가 이야기하였듯 '조경은 어떤 두 무엇이 만나 어떤 방식으로든 마주할 때 일어나' 며 '마주한 것이 가진 차이가 부딪쳐 빚어지는 인식적 결과물이면서 동시에 두 무엇의 경계를 따라 형성된 공간이거나 경관으로 드러난 물리적 결과물' 5)로 그치지 않고 그러한 것을 찾고 만들기 위한 모든 행위를 조경으로 규정한다. 다시 한번 얘기하면 조경은 정원이나 공원, 광장이나 가로, 수목원이나 유원지라는 물리적 결과가 아니라 지속적인 행위로 정의되어야 하며 그러한 까닭에 조경에서 무엇보다 태도가 중요하다.
프로젝트는 18,000m2 면적의 하나스퀘어에서 이학관과 생명과학대 서관 앞 1,400m2의 휴게 공간을 만드는 일이다. 하나스퀘어 전체 면적의 8%의 공간을 바꾸는 작업이란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설계를 시작할 때 분석, 개념, 방향, 전략, 디자인 동기 따위를 설계의 출발로 삼는다. 그러나 전체 캠퍼스 일부인 하나스퀘어의 다시 십분의 일에 미치지 못하는 면적의 공간을 설계하는 일은 무엇을 할지, 어디로 향할지 가리키기보다 여기가 어디인지 위상을 찾고 어떠한 상황에 놓였는지 상태를 살펴 근거와 기준을 세우는 일이 그리기에 앞선다. 하여 대상지를 마주하고 몇 개의 준거準據를 놓는다. 오해는 하지 말아야 한다. 말 되지 않은 설계의 과정이 그러하였다는 것이지 이렇게 정리된 항목이 그리기에 앞섰던 것은 아니다. 말 설계는 의식하든 하지 않았든 설계의 몸짓을 되짚어 헤아려보려는 또 다른 설계의 한 작업일 뿐이다.
첫 번째 준거는 지금 있는 하나스퀘어의 평면을 유지維持하는 것이다. 설계에서 평면은 공간적 질서를 단순화시켜 하나의 차원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언제나 삼차원의 공간이나 사물을 나타낸다. 그래서 전체 평면의 틀을 지키는 일은 공간의 가름에 따라 설계의 평면이 지시하는 질서를 따르거나 거기서부터 새로운 질서의 가능성을 찾는 일이다. 이때 전체 질서에 따른다는 것은 균형과 조화의 문제이지 종속의 관계는 아니다. 또한 이것이 평면적 상상력을 제약하는 것도 아니다. 평면적 상상력은 이차원의 평면이 품고 있는 삼차원의 공간으로 같은 평면에서 출발하나 때때로 전혀 다른 공간으로 드러나곤 한다.
두 번째 준거는 상보相補 관계에 따라 기존 공간의 가름 안에서 공간을 재배치한다. 외부 공간은 그것이 맞닿고 있는 주변의 관계와 상황에 따라 처음 설계 의도와 다르게 이용 행태가 바뀌는 일이 자주 있다. 잠재되었던 이용 행태가 새로 드러날 때 그것을 담아낼 수 있도록 가변성을 담아 유연하게 설계하는 일은 쉽지 않고 이랬을 때 조심스러운 공간의 재배치와 한정되지 않은 쓰임으로 확장이 필요하다. 여기에 더해 수목의 생장과 시설물의 노후라는 사물의 변화 또한 공간의 쓰임과 풍경을 바꾼다. 이러한 변화와 첫 번째 준거에 따라 차고 비는 공간의 상보 관계를 가늠해 다시 조정하며 그랬을 때 일어나는 공간의 쓰임을 살핀다.
세 번째 준거는 공간과 디자인의 연속성을 통해 두 곳으로 나뉜 캠퍼스를 느슨하게 하나로 묶는 것이다. 인문계와 자연계가 적지 않은 거리로 떨어진 지리적 상황에서 하나의 대학으로 보이게 하는 일이 무슨 중요한 일일까 싶어도 공간이 그것을 인지하든 아니든 우리 인식에 영향을 준다고 할 때 공간의 동질성同質性은 비록 떨어져 있어도 하나의 공간적 인식으로 묶인다. 공간의 동질성은 일체一體나 동일同一을 목표로 하지 않는다. 둘이 하나가 되는 것이 아니라 둘이 둘로서 하나가 되는 동질은 내부적으로 어떤 풍경에 비슷한 감각을 갖게 만들고 이것이 외부로 발현될 때 개별성 또는 변별성의 출발이 된다. 이 희미한 동질성으로부터 개인의 개성과 차이가 더해져 또 다른 자아가 형성되는 것이 새로운 장소와 무리에서 겪는 경험이 가진 미덕의 하나가 아니겠는가.
네 번째 준거는 새로운 사물을 끼워 넣어 전체 공간을 마주한다. 이것은 앞선 준거의 배반이고 탈주다. 첫 번째 준거의 유지된 평면 안에서 불필요한 요소를 제거한다. 시선을 가로막는 수목은 간벌間伐하고 쓰지 않는 낡은 시설은 철거한다. 그러고 나서 들어갈 새로운 사물은 기존의 형상과 재료를 따르지 않는다. 다른 형상과 이질의 재료에서 비롯된 전체와 부분의 차이는 풍경을 바꾸고 어떤 잠재된 행동을 깨운다. 들뢰즈식 탈영토화가 이뤄진다 말할 수도 있겠다. 이렇게 기존 공간에 흐르던 시간의 틈을 비집고 새로운 시간을 흘려보내면서 전체 시간은 다시 조율될 것이다. 조경으로 보면 행위로서 조경이 작동하기 시작한 것이고 공간을 사용하는 사람은 영역의 확장과 새로운 행위를 할 가능성이 생겨난다. 그러나 엄밀히 따지면 이것이 새롭다고 할 수 없다. 그 장소가 가진 소극적이고 제한적이었던 행태가 적극적이고 다양하게 확장된 것뿐일 수 있다. 그러니까 연장된 행위를 통해 이질적으로 보이는 두 개의 데크는 오롯이 하나스퀘어가 되고 이전의 하나스퀘어는 두 개의 데크로 인해 이전과 다른 하나스퀘어로 접어든다.
'두 개의 데크' 프로젝트에서 학교의 주문은 이학관 앞은 인문계 캠퍼스의 중앙광장에 놓인 것과 같은 기울어진 너른긴데크와 생명과학대 서관 앞은 휴게 스탠드를 겸한 자그마한 잔디 마당을 만드는 것이었다. 이학관 앞의 기울어진 너른긴데크는 중앙광장의 너른긴데크의 가운데 단면의 기울기를 가져와 일률적으로 적용하여 설계한다. 데크를 기울인 이유는 중앙광장의 말 설계에서 밝혔듯 '기술적으로 인공 지반 위에 식재 토심을 확보하려는 의도' 와 '내적 운동성을 갖게 하려는 까닭' 6)인데 중앙광장의 데크가 경사지에 놓여 뒤틀린 기울기를 가진 것과 달리 평지에 놓이기 때문에 일정하게 똑같은 기울기를 주었다. 제일 높은 곳이 바닥에서 0.9m인데 높지도 않고 낮지도 않게 애매하여 오히려 적당하다. 기존에 네 개의 느티나무 식재 상자와 잔디밭의 크기가 공교롭게도 중앙광장의 데크와 거의 같은 면적이다. 데크 가운데 심은 대왕참나무는 중앙광장에 심은 것보다 작은데 나무의 크기도 그러하고 1.5m까지 솟은 중앙광장의 데크에 비해 존재감은 떨어지나 과학도서관과 이학관 사이 하나스퀘어의 공간으로 볼 때 데크도 거기 심긴 대왕참나무도 이 정도가 적절하겠다. 대왕참나무는 나무의 시간으로 또한 우람해지겠다.
생명과학대 서관 앞은 가로수인 느티나무와 식재 상자 안의 느티나무, 스트로브잣나무, 단풍나무가 얽힌 채 울창하게 막아서 답답하기도 하고 건물 앞에서 단과대만의 자그마한 행사를 치르고 싶은 마음을 담아 학교에서 거친 계획안을 함께 보내왔다. 공간의 상보 관계에서 볼 때 하나스퀘어 전체 공간에서 녹지가 당연해 보이지만, 건물과 관계에서 보면 넉넉하지 않은 입구 전면이 차도는 물론 1m 남짓 높이의 식재 상자와 수목이 병풍처럼 펼쳐져 어떠한 방식으로든 열어둘 필요가 있다. 그래서인지 처음 설계대로 서관 입구에서 하나스퀘어 쪽으로 사선의 길이 나고 삼각형의 식재 상자가 놓여 있는데, 수목이 자라면서 공간을 더 조여오고 짙은 그늘은 피할 수 없었다. 서관 앞의 계단 경곗돌부터 광장까지 식재 상자와 나무를 제거한 빈자리에 서관의 정면을 마주하면서 데크는 화단벽에 기대어 기역으로 꺾어 기울이고 동서로 난 길에 면해 긴의자를 붙여 데크와 한 덩어리로 만든다. 기역자데크는 기존 평면을 유지한 채 식재 상자 자리를 고스란히 대체하고 학교에서 보내준 평면으로 보면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시설이 놓인다. 그러나 쓰임을 따지자면 똑같은 공간이다. 시공 중인 현장에서 데크 건너편의 수령이 다 한 벚나무를 제거하고 새로운 나무를 심어 데크에 그늘을 드리우고 싶었는데 여의치 않다.
대기의 시간이 지구의 움직임과 달의 주기로 나뉘듯 사물의 시간도 서로 역방향으로 흐르는 식물의 시간과 물질의 시간으로 나눌 수 있다. 인간의 시간도 공간을 쓰고 경관을 느끼는 사람의 시간과 조경하는 시간으로 나뉜다. 하나스퀘어의 경우 사물의 시간에서 식물의 시간과 물질의 시간 사이 간극이 너무 벌어진 까닭에 이 공간을 쓰는 사람을 점점 위축시켜 지금에 이르렀다. 여기서 조경의 역할은 우선 벌어진 두 시간의 간격을 좁히는 일고 다음은 이 시간의 간극이 될 수 있으면 천천히 벌어지게 해 공간에서 벌어지는 행태가 지속되도록 하는 것이다. 두 개의 데크는 바로 그 시점에 새로운 시간의 변곡점을 만드는 역할을 한다. 그것은 전면 개보수를 한 듯이 보이는 중앙광장도 마찬가지다. 중앙광장도 큰 변화가 있어 보이지만, 공간의 얼개를 고스란히 유지한 채 데크와 긴의자를 놓고 불필요하게 덧대진 것을 제거한 것 이외에 다른 무엇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이전과 다른 새로운 쓰임이 아니라 그곳이 가진 원래 행태가 좀 더 지속적이고 적극적으로 변했을 뿐이다. 하나스퀘어 전체로 보면 그저 땅에 붙은 데크 두 개, 면적으로 따지면 두 데크 합쳐 500제곱미터가 조금 넘는 자그마한 시설물 그러나 이질의 재료와 낯선 형상이 주는 경관적 변이와 이곳에 모여들 사람이 만드는 역동적 풍경은 일정하게 흐르던 하나스퀘어의 시간에 새로운 시간 줄기를 만들어 생기를 불어넣을 것이다. 이것이 조경이 시간의 흐름 속에 놓이는 여러 방편 중에 하나라 말해도 되지 않을까.
_2026. 10.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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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 개의 시간에 관한 낙서, 2026. 10.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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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_https://stdict.korean.go.kr
2. 윤국병, 조경사, 일조각, 1978 초판, 1988 중판, 177_181쪽.
3. 윤국병, 같은 책, 364_365쪽.
4. 이수학, '오브제 _디자인 4제 세 번째', 뉴스레터 나뭇잎 15호, 2025. 03. 07.
__https://ateliernamoo.stibee.com/p/17
'조경에서 정원을 이야기할 때 여전히 파라다이스un paradis나 아르카디아une arcadia, 무릉도원武陵桃源이나 이상향理想鄕을 이야기하지만 19세기에서 20세기를 거치면서 세계와 자아가 철저하게 분리되었듯 완결된 구조로서 정원은 존재하지 않는다. 정원은 이제 개별적이고 파편화된 각각의 이야기만이 존재한다. 그래서 지배계급의 공간에서 노동자, 농민, 시민, 인민의 공간인 공원은 하나의 이야기에 수렴되는 구조가 아니라 수많은 의견 대립과 이해 상충의 결과인 미완의 열린 결말을 가진 구조가 되었다.'
5. 이수학, 태도Ⅰ, 아뜰리에나무, 2023, 19쪽.
6. 이수학, '고려대학교 서울캠퍼스 인문사회계 중앙광장 대수선 말 설계', 뉴스레터 나뭇잎 14호, 2025. 02. 14.
_https://ateliernamoo.stibee.com/p/16
'기술적으로 인공 지반 위에 식재 토심을 확보하려는 의도도 있지만, 데크가 기울어진 이유는 내적 운동성을 갖게 하려는 까닭이다. 익숙하지 않은 물리적 조건에서 일어나는 행동의 우발성 아니 중력에 순응하는 낙하와 저항이 일어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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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월 넷째 주 노동요 선곡표 ]
_이랑, 임진강
_한영애, 꽃을 잡고_1934
_이혜원 · 박종호, je te veux
_pink martini, splendor in the grass
_검정치마, antifreeze
_pink floyd, time
_françoise hardy, star
_노래를 찾는 사람들, 사계 (무반주)
_elina garanca, bachianas brasileiras no. 5 w389 : i. ária (cantilena)
_chet baker, almost blue
_josé van dam, ich bin der welt abhanden gekommen
_joni mitchell, a case of you
_pink floyd, the great gig in the sky
_김태은, 유수 (컨템퍼러리 산조)
_정재일 · 요조, 가을을남기고간사랑
15곡, 1시간 1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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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oh you're in my blood like holy wine
you taste so bitter and so sweet
oh I could drink a case of you darling
still I'd be on my feet
oh I would still be on my feet
······
미싱은 돌리지 않고 조니 미첼의 노래를 들으며 희경 시인이 추천해 준 앤 카슨의 '에로스, 달콤씁쓸한'*을 읽는다. 제자 시인인 그가 스승인 대시인에게 받은 포도주**를 다시 받아 마신 시인이 아닌 또 다른 그의 피에서 달콤씁쓸한 맛이 난다.
* 앤 카슨anne acrson, 에로스 달콤 씁쓸한 eros the bittersweet, 황유원 옮김, 난다, 2025.
** san felice il grigio chianti classico riserva,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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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후 세 시, 그때 그는 다방에 앉아 있었다 _03 ]
이런 얘기해도 될까
‘여자도 아니고, 우는 것도 아닌’ ” 노래를 부른 남자. 옆에서 그게 아니고 ‘여자가 없어도 울지 말라’는 뜻이라고 정정해 주지만 오역誤譯의 즐거움이란 무지無知가 주는 자가당착自家撞着의 나르시시즘과 비슷하다. 무식을 먹고 자란 나무의 이 뻔뻔함을 이제 와서 어쩌겠는가. 어쨌든 여자가 나오고, 흐느낌이 들리지 않는가. 그렇다면 나머지 일은 각자 알아서 상상할 일이다. 한 장의 사진을 볼 때, 사진 속의 피사체를 주시하게 되지만 인화된 사진에서는 보이지 않는 사진을 찍었던 바로 그 또는 그녀, 보이지 않는 그 또는 그녀가 항상 존재하고 사진은 엄밀히 말해 피사체의 모습이기보다 피사체를 담아내는 그 | 그녀의 심성心性이다. 밥 마리의 노래 또한 그러하다. 그녀에 대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그에 대한 노래인 것. 만약 밥 마리가 그녀였다면 역시 그녀에 대한 것이 될 터. 이런 횡설수설은 또 무슨 심사心思인가. 주말 내내 몸을 혹사酷使하고 일을 핑계로 긴 휴식을 가진 뒤 다시 몸을 혹사하고 있다. 그렇다고 주중의 시간이 긴 휴지부이기보다 알콜에 절인 오이지다. 줄창 비만 오던 여름이 비 그치자, 가을이 되었다. 그녀는 누비옷을 꺼내 입고, 그녀는 검은 옷을 챙겨입고, 그녀는 치과의사와 열애 중이다. 그는 오늘도 방송국의 공짜 표를 타기 위해 댓글을 달 것이다. 가을이다. 낙엽 떨어지듯 가벼워야 된다고 술상에서 그는 주사酒邪를 부렸던 모양이다. 누리집을 조금씩 바꾸고 있다. 예전 것이야 손댈 수 없지만 소금쟁이 물 위를 미끄러지듯 가라앉은 침전물沈澱物이 더 이상 물을 흐리지 않도록 늪을 건너기로 한다. _2007. 10. 03. 명륜동 밥상머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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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09. 28. 명륜동 밥상머리
” _bob marly & the wailers, no woman, no cry, 나뭇잎_31호, 팔월 세째 주 노동요 선곡표 열한 번째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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