떨어지는 동백꽃의 파문波紋이 붉게 흐무러져 계획지를 물들이는 단속적斷續的 시간의 궤적軌跡을 뒤늦게 쫗아서 따라간다追行
|
|
|
떨어지는 동백꽃의 파문波紋이 붉게 흐무러져 계획지를 물들이는 단속적斷續的 시간의 궤적軌跡을 뒤늦게 쫗아서 따라간다追行
|
|
|
이천십구 년 가을 저녁녘 일훈 선생이 문자로 이미지 하나를 보내주셨다. 제주 4·3평화공원 기념관에서 하는 사진전 포스터였다. 꼭 봐야 하는 전시라시며 제주 출장 갈 때 같이 가서 보자 했는데 그 약속은 지키지 못했다. 지키지 못한 약속이 어디 그것뿐이겠는가 만은 대신 전시도 끝난지 한참 뒤 혼자 출장 갔던 길에 4·3평화공원 기념관에 들러 전시 사진집 '기억의 목소리' 두 권을 사서 올라와 한 권은 선생께 드리고 나머지 하나는 친구를 줬다. 그날은 신정동 가로에 늦은 벚꽃이 흐드러졌다.
|
|
|
감청색 무명천 위에 놋쇠 숟가락, 천의 주름을 따라 일렁이는 빛의 착란錯亂, 제주 바당 위에 놋숟가락 하나 떠 있다. 짧은 한 생애가 온몸으로 흔들린다. 거친 보리밥 숟가락에 담겨 입으로, 몸으로 들어간다. 한 목숨이 한 생애가 숟가락에 붙어 있다. 밥상 위에 가지런히 놓였을 숟가락 하나, 숟가락 둘, 숟가락 셋, 숟가락 넷. 숟가락 다섯. 하나의 숟가락이 불러내는 밥상 위의 모든 숟가락. 말하는 숟가락, 밥상에서 나누는 숟가락의 목소리, 숟가락을 놓던 물비린내 손, 김 모락 오르는 반지기밥과 고사리. 밥상을 준비하던 정지 그리고 멈춰진 시간. 살아남은 숟가락 하나가 불러내는 한 사람 한 목숨, 한 생애, 한 삶. 숟가락 하나가 불러내는 한 가족, 한 왓, 한 가름, 한 흘. 숟가락 하나가 불러내는 학살 당한 모든 호명되지 못한 사람들.
|
|
|
^ 바람의 뼈
한라산에서 바다로 흘러내리는 완만한 지형이 대상지를 관통하는 지형적 맥락을 이룬다. 여기서 시선은 거슬러 한라산을 우러르거나 바다를 내다보는 두 방향의 경관적 맥락을 또한 갖는데 이것을 바깥 맥락이라 이름할 수 있다. 앞서 만들어진 4·3평화공원은 깎아 만든 둥근 원형의 단과 한라산을 축으로 공간과 동선을 잇는 내부 맥락을 만들었다. 그러나 인위적으로 깎은 거대한 원형은 공간을 만들지 못했고 축은 도상圖上에만 존재한다.
계획은 축과 원을 가져와 앞서 만들어진 공원과 내적 맥락을 이어 하나의 전체 공간이 되도록 하면서도 원지형을 건드리지 않고 그대로 살려 땅의 형상을 잊지 않는다. '잊지 않는다'가 중요하다. 건물은 축에 비껴 낮게 자리 잡고 길은 지형을 따라 놓인다. 원형의 비어있는 초지는 부재한 영령에 대한 무형의 기억이며 여기에 바람의 뼈가 드러난다. 그리고 숲을 이룬 나무가 상보적으로 기억의 허공을 두텁게 감싸 안고 바다를 향한 시선의 축을 열어 놓는다. 완전한 원을 이루지 못한 두 개의 철판이 푸른 초지 위로 붉은 녹물 흘리며 웅크린 등뼈처럼 땅 위로 솟아 있다. 그것은 잘려 나간 삶의 예리한 단면이고 끝내 드러나고야 마는 어두운 진실의 역사다. 붉은 등뼈는 이제는 부를 수 없는 수만의 지워진 이름이며 뭉그러져 바람에 실려 온 메아리다.
_2023. 05. 03.
|
|
|
바람의 뼈 입단면, 초벌그림 부분 _2023. 04. 26.
|
|
|
공모명 | 제주 4∙3평화공원 활성화사업 건축 설계공모
기간 | 2023. 02. 17. _2023. 05. 03.
발주기관 | 제주특별자치도 특별자치행정국 4·3 지원과
대지위치 | 제주시 봉개동 산53-5번지 외 1필지
대지면적 | 30,000㎡ 미만
연면적 | 4∙3 국제평화문화센터 4,000㎡, 4∙3 트라우마 치유센터 1,500㎡, 빛의 통로 4m(W)x3m(H)x80m(L)
층수 | 지하 1층, 지상 2층
예정 공사비 | 21,684,000,000
예정 설계비 | 983,000,000
건축설계 | 엠엠케이플러스 + 아란건축사사무소
|
|
|
#04 다시 사진집 | 기억의 목소리 II · III |
|
|
나뭇잎 12호에 동백나무를 소개하면서 고현주의 사진집을 다시 보고 싶어졌다. 제주 김녕에 증축하는 초등학교 조경 설계 현장을 둘러본다는 핑계로 내려간 출장길에 4·3평화공원 기념관에 들렀는데 기념품 가게가 일월 한 달 문을 닫고 있단다. 안내하는 분께 사진집을 사러 서울서 부러 왔다하니 그러면 사야지 않겠냐며 담당 직원을 불러준다. 먼저 나왔던 사진집은 없고 대신 이후의 작업을 담은 '기억의 목소리 II · III'만 있다. 두 권을 다 달라고 했더니 세 번째 사진집 값만 주면 된단다. 고맙다 말을 전하고 기념관 옆 작은 동백나무숲에 기대어 앉는다. 길 건너 현상설계 대상지는 가림막이 쳐져 있다. 여긴 날이 추워 동백꽃은 아직 꽃망울만 가득하다. 시내는 동백이 한창인데. 구름 잔득 낀 하늘이 어두워지고 있다. 그 사이 작가는 암 투명을 하면서 작업을 이어가다 돌아가셨단다. 일훈 선생이 돌아가시고 한 해 뒤였다. 바람이 분다. 시내버스가 오려면 조금 더 기다려야 한다.
검은 땅, 검은 바다에 붉은 보자기로 감싼 붉은 등이 떠내려간다. 정령精靈인 듯 애기 관인 듯 동백꽃인 듯 떠내려간다. 바다도 땅도 검다. 이명耳鳴처럼 파도 소리가 울린다. 누군가 스쳐 지나갔던가. 소슬하다. 모살물에서 소주를 붓고 죽음과 놀다 그예 술병이 났다. 이유야 어떠하든 아픈 몸은 의식을 두 방향으로 이끈다. 자신의 아픈 몸 안으로 파고들어 의식을 몸 안에 가두거나 아픈 다른 몸과 몸으로 건너가며 확장하거나. 그녀가 확장한 의식의 자장磁場 안에서 17센티미터도 채 안 되는 놋숟가락이 109.9미터의 열연강판으로 만들어진 바람의 뼈가 되었다. 비록 만들어지진 않았지만 이리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설레지 않는가.
|
|
|
고현주, 기억의 목소리, 글 허은실, 2019. (사진집이 없어 정확한 서지 정보를 적을 수 없다.)
고현주, 기억의 목소리 II, 기획 (사)제주국제화센터, 디자인 양윤희, 본문 글 허은실, 번역 한영숙, 인터뷰 진행과 글 문봉순, 디웍스, 2020.
고현주, 기억의 목소리 III _아름다운 제의, 디자인 양윤희, 본문 글 허은실, 번역 한영숙 · 조지영 · 이춘숙 · 고영희, 디웍스, 2023.
|
|
|
4·3 평화공원 동백나무숲에서 주워 온 동백의 살과 뼈, _2025. 01. 14.
|
|
|
아뜰리에나무 ateliernamoo.xyz@gmail.com
+82 2 766 4128-9
02880 서울시 성북구 창경궁로43길 16, 4층
|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