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3년 봄, 민주광장 집회 모습, 2025. 02. 13.
팔십년대를 거치면서 대학이 저마다의 '민주광장'을 하나씩 가졌듯이 이천년대 들어서 대학 캠퍼스의 공간 구조가 크게 변하기 시작한다. 시작이야 학교마다 다르겠지만 대학 또한 사회의 한 부분으로 어떤 의미에서 사회의 변화에 어느 곳보다 민감하게 반응하는 까닭에 그것이 물리적으로 드러나는 공간의 변화는 어찌 보면 당연하다. 이것은 대학을 포함해 학교라는 제도와 공간이 내재적 필요와 변화, 발전으로 시작된 것이 아니라 강점기 일본 제국주의에서 시작된 까닭만은 아니다. 오히려 그 어느 공간보다 학교는 시대와 사회를 가장 잘 반영하고 드러낸다. 그것은 학교가 학교의 처지에서 보면 현재지만, 학생의 관점에서 보면 미래를 품은 현재이고 학교 밖 사회의 측면에서 미래이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운동장이 가진 공간적 잠재력의 숱한 미덕에도 불구하고 일제강점기에 시작된 교사校舍와 운동장의 도식적 공간 관계가 내포한 전제적이고 집단적인 군사軍士 양성의 예비 과정이 물리적으로 구현된 것이란 의심은 지워지지 않는다. 그러나 한번 정해진 공간의 전형은 쉽게 바뀌지 않고 그것이 변하기까지 한 세기의 시간이 필요했다. 고려대학교 대운동장이 광장으로 바뀐 것은 이 변화의 시작이었다.
중앙광장은 만들어 주어진 곳이며 그러한 까닭에 어쩔 수 없이 수동적 공간의 한계를 갖는다. 이전 운동장이 가진 잠재력의 제한된 일부만 가져올 수밖에 없는 한계는 신축 건물과 녹지에 의한 공간의 축소나 잔디로 된 바닥의 재질, 교문에서 본관으로 이어지는 공간적 상징성의 우위가 영향을 미치겠지만, 무엇보다 광장이라는 공간의 정체성과 쓰임의 불일치에서 발생하는 한계다. 민주광장처럼 스스로 찾아 발견한 광장이 가진 공간과 쓰임의 일치는 만들어 주어진 공간, 특히 아무런 행위의 지시가 없는 광장의 경우 공간과 일어나는 행위 사이에 벌어지는 일정한 간극은 어찌할 수 없다. 이 어찌할 수 없음에서 설계가 시작된다. 비록 그것이 완전한 합일合一에 이르지 못한다 해도 설계는 공간과 행위의 온전한 합일을 향하여 나가도록 하는 또 다른 행위이어야 한다.
만약 우리가 낱말이 가진 주술에서 조금 벗어난다면, 용어用語라고 지칭되는 말의 쓰임用에서 조금 멀어진다면, 만약 그곳이 정작 그 말이 가리키는 그러한 곳이 아니라 아직 말을 갖지 못한 규정되지 않은 어떤 곳을 대체할 말이 없어 사용한 것이라면 말과 그 말이 가리키는 손끝에서 벗어나 다른 이야기가 가능하지 않겠는가. 중앙광장의 진정한 쓰임은 광장이 내포한 다변과 가변의 행위를 중심으로 하는 공간이 아니다. 그러니 운동장의 잠재력에 관한 기억도 의미 없다. 오히려 그곳은 본관과 서관, 동관 그리고 새로 지은 기념관과 미래관으로 이어지는 고려대학교의 역사가 물리적인 구체具體로 드러내는 상징의 공간이다. 여기에 운동장의 허공이 만든 시각적 열림의 기억만이 유효하다. 입학식이나 졸업식, 특별한 행사를 위한 대규모 행사는 행위 자체보다 행사의 상징성이 공간의 상징과 어우러진 예외적 또는 의례적 사건이라 해야겠다. 그래서 중앙광장은 광장 일반이 갖는 사건성보다는 둘러보기, 살펴보기, 처다보기, 기념하기, 휴식과 같은 일상성이 더 강하게 작동한다. 다시 말하면 중앙광장은 상징적 공간으로 열려 있으며 그 쓰임은 공원에 가깝다.
설계는 기존 공간 배치의 구조를 따르면서 수목과 시설물을 선별적으로 받아들이고 새로운 경관적 가치를 찾아 확장하며 광장의 일상성을 확보하는 세 가지 방향으로 나아간다. 거창한 말과 달리 설계는 명료하고 신속하게 진행된다. 잔디밭과 송림 그리고 바닥 분수를 그대로 두어 기존 공간 배치 구조를 따르면서 불필요한 포장과 시설을 제거하여 익숙한 공간의 틀 안에서 새로운 것을 찾는다. 광장에서 송림으로 이어지는 경관적 시선을 깊숙이 열기 위해 녹지 주변에 있던 영산홍을 모두 제거한다. 수세가 점점 위축되고 있는 식재상자의 단풍나무를 제거하고 새로 식재상자를 만든다. 여기에 지하고가 높고 수직성이 좋은 원추형의 잎지는 큰키나무를 심어 시선의 높이에서 광장에서 송림으로 이어지는 시선을 열고 상부에서 송림을 배경으로 한 번 더 광장을 감싸 계절에 따라 변하는 시간의 장막을 친다. 긴의자는 식재상자 역할을 하고 수직의 대왕참나무 그늘 아래서 쉴 수 있다. 바닥분수의 수조 부분은 그대로 두고 새로 바닥 수반 역할을 하는 둥근콘크리트대를 둔다. 대는 주변 경사에 따라 자연스럽게 교문 쪽으로 드러난다. 그리고 식재상자붙은너른의자가 바닥분수 양 옆으로 도열堵列한다.마지막으로 기울어진 긴데크를 잔디밭에 붙여 광장의 서쪽에 둔다. 기울어진너른긴데크는 폭 8.55m에 길이 42m, 제일 높은 곳이 바닥에서 1.5m로 본관 쪽으로 가면서 바닥의 경사에 따라 상대적으로 낮아진다. 본관에서 교문 쪽으로 2m의 높이 차이가 나는 까닭에 잔디밭을 기준으로 데크의 뒷쪽을 거의 수평으로 할 경우 이렇게 자연스럽게 기울어진 형상을 띤다. 그리고 세 개의 엇갈린 등받이를 놓고 나무 일곱 주를 심는다.
데크는 잔디밭의 연장이자 잔디밭의 기댈 언덕으로 서로 상보相補하며 시각적인 측면과 더불어 잔디밭의 쓰임을 연장하면서 그 한계를 넘어 조금 다르게 쓰일 가능성을 갖는다. 아침은 동쪽의 볕이 들고 오후에 서향의 그늘에 앉거나 눕고, 마주하거나 기대어 빈둥거리면서 녹색의 허공과 푸른 하늘을 우러를 수 있다. 스스로 가진 마음의 구속만 없다면 사소한 행위지만 구애拘礙받지 않는 일상의 행동 속에서 자유를 느낄 수도 있을 게다. 기술적으로 인공 지반 위에 식재 토심을 확보하려는 의도도 있지만, 데크가 기울어진 이유는 내적 운동성을 갖게 하려는 까닭이다. 익숙하지 않은 물리적 조건에서 일어나는 행동의 우발성 아니 중력에 순응하는 낙하와 저항이 일어난. 이러한 일상성의 확보는 민주광장이 가진 사건성과 상대를 이루면서 두 개의 중심으로 타원의 궤적을 그리는 삶의 우주를 형성한다. 이것을 다르게 이야기하면 민주광장이라는 사건의 중심과 중앙광장이라는 일상과 기억의 중심이 고려대학교 캠퍼스의 보이지 않는 우주를 휘감아 도는 물리적 실체實體라고 말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_2025. 02.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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