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표를 두드리면 크게 볼 수 있다. ]
1. 궁궐지1 경복궁 · 창덕궁, 서울학연구소, 1994, 63쪽.
2. 같은 책 11쪽.
‘홍무 27년(1394) 갑술, 태조가 즉위한 지 3년 한양을 도읍으로 정하고, 먼저 종묘를 세운 다음 궁궐을 지었다. ··· 정도전에게 명하여 궁전의 이름을 짓도록하니, 경복궁이라 하였다. ··· 남북동서의 문을 차례로 광화문, 신무문, 건춘, 영추이라 칭했다. 태조 4년(1395)을해 9월에 종묘와 궁궐이 차례로 완성되어 경복궁으로 옮겼다.’
3. 같은 책 63쪽.
‘세종 원년(1419) 기해에 왕이 창덕궁으로 이어했다’
4. 같은 책 122쪽.
‘우리 세조대왕께서는 본래 샘물을 사랑하셨는데 일찍이 영순군 부溥와 오산군 수㴻를 불러 좌우로 나누어 보내서 열무정 곁에서 우물을 팔 만한 곳을 물색하게 하였다. 각각 두 곳씩을 얻었는데 물을 차고 맛은 좋아 감로甘露와 옥설玉屑에 비길 뿐만이 아니었다. ··· 왕께서 이에 첫 번째 우물에 이름 붙이기를 마니摩尼라 하고 두 번째 우물은 파려玻瓈라 하였으며 세 번째는 유리琉璃 그리고 네 번째는 옥정玉井이라 하고 각각 우물 곁에 돌을 세워 표시하였고, 또 마니정가를 친히 지어 여러 신하에게 보였으니 그 뜻이 심히 훌륭하였다.’
궁궐지에 따르면 ‘열무정은 봉모당 터이고 봉모당은 열고관의 서남에 있다’ 고 나온다. 이것을 동궐도에서 확인하면 수정전 북동쪽에 봉모당이 있다. 동궐도를 보면 부용지 주변으로 사정기비각과 뒤쪽에 우물이 하나 그려져 있어 궁궐지의 서술과 차이 난다. 또 한 가지 사실, 숙종의 사정기를 쓴 이유가 ‘오직 이 두 우물만이 예전 모습으로 남았으나 풀은 자라 쑥대밭이 되었으니 보기에도 그 모습이 쓸하기만 하다. 나는 세월이 오래일수록 지난 사적이 자꾸 없어지는 것을 두러워하여’ 그것을 보수하고 글을 남긴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동궐도가 그려진 순조 때 두 개의 우물 중에 하나만 남아 있었던 듯하고 그 마져도 사라졌었는데 2008년 발굴 조사를 통해 두 개의 우물 위치와 유구가 확인 되었다.
국립문화재연구소, ‘창덕궁 우물지 · 빈청지 발굴 조사 보고서’, 2011.
5. 윤국병, 조경사, 일조각, 초판 1978, 중판 1988, 280쪽.
‘이 후원은 창덕궁이 창건된 이듬해인 태종 6년 4월에 궁의 동북쪽 구석진 곳에 해온정을 세움으로써 축조가 시작되었으며 한국정원의 특징을 가장 잘 나타내고 있다. 축조되기 시작했을 때에는 별로 넓지 않았으나 ···’
6. 한국생활사박물관 편찬위원회, 한국생활사박물관 09 ‘조선생활관 1’, 사계절출판사, 2003 1판 1쇄, 2004 1판 3쇄. 6 · 96쪽.
‘1395년 천상열차분야지도 각인 각석, 1397년 낙안읍성 건설, 1400년 한양 5부 학당 설치, 1402년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 제작, 1402년 호패법 시행, 1413년 8도 지방 행정 조직 완성, 1420년 부민고소금지법 시행, 1425년 관습도감 설치, 1429년 농사직설 편찬, 1431년 간의대 설치, 1434년 자격루 설치, 1435년 정간 보 간행, 1437년 앙부일구 제작, 1438년 금오신화 간행, 1441년 측우기와 양수표 제작 설치, 1443년 훈민정음 창제, 1446년 훈민정음 반포, 1451년 고려사 편찬, 1474년 국조오례의 편찬, 1493년 악학궤범 편찬’
7.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세종 즉위년 무술 1418, 11월 3일 기유.
8.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세종 즉위년 무술 1418, 12월 29일 갑진.
‘나례儺戱, 음력 섣달 그믐밤에 민가와 궁중에서 마귀와 사신邪神을 쫓기 위하여 베풀던 의식 놀이. 원래 중국 주周나라 때부터 유래된 풍습으로, 새해의 악귀를 쫓는다는 명목으로 행해졌는데, 고려 정종靖宗 이후로 우리 나라에서도 행해졌다. 칙사勅使의 영접, 인산因山, 왕의 행행行幸 때도 차츰 행하게 되었다. ··· 화산대火山臺는 나래 후 처용놀이 또는 잡화라는 가면놀이가 끝나고 금원禁苑에 오산鰲山, 즉 화산대를 베풀고 그 위에서 불놀이를 하던 것이다.’
포도화葡萄火, 매화포埋火砲라고도 불린다. 실록의 기록은 경복궁 경회루에서 했다는 기록도 있으나 주로 금원 또는 후원에서 했다는 기록만 있어 정확히 경복궁 후원인지 창덕궁 후원인지 확인할 수 없다.
신명호, 조선 왕실의 의례와 생활 | 궁중문화, 돌베개, 2002 초판, 2014 초판 7쇄, 176-181쪽.
9. 조선왕조실록 세종실록, 세종 8년 병오 1426, 12월 19일 무인.
10. 조선왕조실록 세조실록, 세조 8년 임오 1462, 2월 12일 정축.
11. 궁궐지1 경복궁 · 창덕궁, 서울학연구소, 1994, 139쪽.
‘··· 장원봉 북쪽에 있고 남쪽에 잠단蠶壇 있는데 ··· 채상단採桑壇의 옛터에 지었고 공혜왕후恭惠王后(성종비成宗妃 한씨韓氏)가 항상 이곳에서 잠례蠶禮를 행하였다.’
김주희 주석, 한국고전번역원.
‘관덕觀德, 활쏘기를 뜻하는 말. ‘예기禮記’ 사의射義에 ‘활쏘기는 진퇴進退와 주선周旋이 반드시 예禮에 맞아야 한다. 마음이 바르고 자세가 곧아야 활과 화살을 잡을 때 안정되고 든든하며, 이런 다음에야 과녁을 맞힐 수 있다. 이래서 덕행을 보게 되는 것이다.’ 했다. 활 터를 관덕정觀德亭이라 한 것도 이 때문이다.’
12. 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
세종이 명하여 편찬을 시작해 세조를 거쳐 1474년 성종 5년에 완성한 국가의 기본 의례 규정하고 그 절차를 도식과 함께 정리한 예전禮典이다. ‘국조오례의’는 국가의 기본 의례를 길례吉禮 · 가례嘉禮 · 빈례賓禮 · 군례軍禮 · 흉례凶禮 다섯 가지로 나눈다. 길례에 속하는 친잠례親蠶禮와 친경례親耕禮는 기우제祈雨祭 · 기곡제祈穀祭 · 선농제先農祭는 농업이 근간인 사회에서 이를 장려하는勸農 중요한 의례였고, 한 해 농사 상황과 기후를 살피는 것이 국왕 임무이기도 했다.
13.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https://stdict.korean.go.kr
‘열무閱武, 임금이 몸소 군대를 사열함.’
14. 조선왕조실록 성종실록, 성종 3년 임진 1472, 12월 29일 신묘.
15. 조선왕조실록 성종실록, 성종 8년 정유 1476, 12월 30일 기해.
16. 조선왕조실록 성종실록, 성종 8년 정유 1477, 윤 2월 3일 신축.
17. 조선왕조실록 성종실록, 성종 8년 정유 1477, 3월 14일 신사.
18. 조선왕조실록 성종실록, 성종 8년 정유 1477, 12월 30일 계해.
19. 조선왕조실록 성종실록, 성종 10년 기해 1479, 1월 8일 을축.
‘농상農桑은 나라의 큰 정사大政이니, 반드시 몸소 친히 보아야만 잠경蠶耕의 이로움을 알 것이다. 이제부터는 내외內外의 후원後苑에 모두 뽕나무를 심고 또 그 땅의 마땅함을 헤아려 수전水田을 만들어 내관內官으로 하여금 맡아서 다스리게 하라.’
20. 조선왕조실록 성종실록, 성종 10년 기해 1479, 11월 7일 무자.
21. 조선왕조실록 성종실록, 성종 10년 기해 1479, 12월 15일 병인.
22. 조선왕조실록 성종실록, 성종 13년 임인 1482, 9월 1일 병신.
23. 궁궐지2 창경궁 · 경희궁 · 도성지, 서울학연구소, 1996, 11쪽.
24. 조선왕조실록 성종실록, 성종 15년 갑진 1484, 7월 5일 기축,
25. 조선왕조실록 성종실록, 성종 17년 병오 1486, 3월 26일 신미.
26. 조선왕조실록 성종실록, 성종 18년 정미 1487, 1월 15일 병진.
27. 조선왕조실록 성종실록, 성종 18년 정미 1487, 2월 6일 병자.
28. 조선왕조실록 성종실록, 성종 21년 경술1490, 12월 26일 계유.
29. 조선왕조실록 성종실록, 성종 24년 계축1493, 11월 8일 기해.
‘유인홍이 화산대를 정지할 것을 청하고, 이세인이 내농작內農作을 정지할 것을 청하니, 임금이 말하기를, “농작農作은 풍년이 들기를 빌기 위한 것이지 놀며 즐기기 위한 것이 아니다. 그리고 화산대는 방화放火를 익히는 것이며, 그 유래가 이미 오래 된 것이다.”’
30. ‘조선시대 삼향에서 생산된 대나무가 전국 최고’, 무안신문, 2015. 12. 11. http://www.muannews.com.
신증동국여지승람 제35권, 전라도全羅道 나주목羅州牧, 제영.
‘삼향三鄕의 죽전竹箭이 천하에 소문나니,’
31. 연산군일기, 민족문화대백과사전, https://encykorea.aks.ac.kr
32. 조선왕조실록 연산군일기, 연산군 1년 을묘 1495, 7월 26일 정미.
33. 조선왕조실록 연산군일기, 연산군 3년 정사 1497, 1월 4일 병오.
34. 조선왕조실록 연산군일기, 연산군 3년 정사 1497, 12월 29일 병신.
‘또 전교하기를,“포도화葡萄火는 내가 당초에 간략하게 만들어서 구경하려 했는데, 지금 사치스럽게 만들었으니 매우 불가하다.” 하매, 승지 신수근이 아뢰기를, “군기시軍器寺에서 취품取稟을 하지 않고 멋대로 호사스럽게 만들었으니 매우 불가합니다. 청컨대 국문하옵소서.”하니, 전교하기를, “금년에는 마침 천변天變이 있었고, 화산대도 역시 심한 낭비가 되므로 일찍이 간략하게 만들라고 명령했는데, 지금 어찌 이 지경에 이르렀느냐? 그 전례의 유무를 물어서 국문하는 것이 가하겠다.”하였다.’
35. 조선왕조실록 연산군일기, 연산군 4년 무오1498, 11월 8일 경자.
36. 조선왕조실록 연산군일기, 연산군 5년 기미 1499, 6월 6일 계사.
37. 조선왕조실록 연산군일기, 연산군 5년 기미 1499, 12월 14일 기해.
38. 조선왕조실록 연산군일기, 연산군 6년 경신1500, 2월 29일 계축.
39. 조선왕조실록 연산군일기, 연산군 6년 경신1500, 4월 18일 신축.
40. 조선왕조실록 연산군일기, 연산군 9년 계해 1503, 9월 10일 계유.
41. 조선왕조실록 연산군일기, 연산군 10년 갑자 1504, 3월 27일 무자.
42. 조선왕조실록 연산군일기, 연산군 10년 갑자 1504, 5월 11일 경자.
‘왕이 날마다 여러 희첩姬妾들과 후원에서 잔치 놀이하며 유생들이 엿보는 것을 싫어하여 이 전교가 있은 것이다.'
43. 조선왕조실록 연산군일기, 연산군 10년 갑자 1504, 11월 11일 정유.
44. 조선왕조실록 연산군일기, 연산군 10년 갑자 1504, 12월 30일 병술.
45. 조선왕조실록 연산군일기, 연산군 11년 을축 1505, 1월 26일 임자.
46. 조선왕조실록 연산군일기, 연산군 11년 을축 1505, 3월 3일 무자.
47. 조선왕조실록 연산군일기, 연산군 12년 병인 1506, 1월 21일 신축.
‘전교하기를, “인양전仁陽殿 · 서총대瑞葱臺의 공사를 마친 후에 동·서로 성을 쌓을 것이지만, 아직 그 성터에 큰 나무를 죽 심어서 성안을 가리게 하라.”하였다. 그때에 명하여 인양전을 짓고, 또 후원에 돌을 쌓아 대臺를 만들고 용을 아로새긴 돌로 난간欄干을 만들었는데, 1천 명은 앉을 만하고 높이는 10길이나 되었다. 이름을 서총대라 하고, 그 앞에는 큰 못을 팠는데, 차송한 인원 1백 명이 감독하였으며, 역군은 수만 명이나 되어, 호야呼邪 하는 소리가 밤낮으로 끊이지 않았으니, 그 소리가 천지를 진동하였다.’
녹음대, 춘당대, 서총대의 위치에 관한 연구는 다음을 참조해 확인할 수 있다.
정우진, 동궐東闕 후원後苑의 변천과정變遷過程과 원형경관原型景觀 분석, 석사학위논문, 2011, 07, 79_90쪽.
* 조선왕조실록은 국사편친위원회와 한국고전데이터베이스 누리집을 참조하였다.
국사편찬위원회, https://sillok.history.go.kr/
한국고전데이터베이스, https://db.itkc.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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