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들은 스텝steppe | 공백구역으로 들어간다
제2소비에트연방이 반혁명분자인 자본주의자 적들에게 패하면서 수도 오르비즈가 함락되고 한 동안 파르티잔 한 무리와 게릴라전을 치르던 그들은 방사능에 오염된 무인지대인 공백구역으로 들어간다. 공백구역은 100년 전, 도시와 콜호스의 자치를 위한 수천 기 원자력발전소의 폭발로 인해 만들어졌다. 그곳은 탈주병도 적도 머무르지 않는 곳으로 방사능량이 어마어마했고, 그 수치는 몇십 년 동안 줄지 않았으며 침입자에게 핵으로 인한 죽음뿐 그 무엇도 약속하지 않았다. 그러나 공백구역의 동물 없는 숲, 폐허가 된 도시, 황량한 도로, 풀이 무성한 철도가 만드는 풍경은 불안을 일으키지 않으며 감지할 수 없는 방식으로 진동하는 고요한 초지, 스텝이 되었다. 12, 14, 26.
전망은 어딘지 영원 같은 면이 있었다. 하늘의 광대함이 초원의 광대함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들은 작은 언덕 위에 있어서 멀리까지 보였다. 한 줄기 철도가 풍경을 둘로 갈랐다. 대지는 옛날에는 밀이 무성했으나, 시간이 흐르며 선사시대의 곡물과 돌연변이 볏과 풀들이 자라는 미개지로 돌아갔다. 13.
일렁이는 풀들. 풀들의 소리. 풀들이 살랑이는 소리. 풀들의 색은 다양했고 저마다 바람에 흔들리거나 굽히는 방식이 달랐다. 어떤 풀들은 버텼다. 어떤 풀들은 유연하게 축 늘어져 바람이 지나가길 기다렸다가 제 모습을 되찾았다. 풀들, 그 수동적인 움직임, 그 저항의 소리. 20-21.
종아리에, 무릎에, 허벅지에 걸리는 풀들. 여간해선 꺽이지 않는 풀들. 질기고, 유연하고, 난폭한 풀들. 조금만 건드려도 물러나는 풀들. 어떻게 해도 발에 짖눌리지 않는 풀들. 강렬하고 불쾌한 냄새를 풍기는 풀들. 구역질 나는 악취를 풍기는 풀들. 넘기 힘든 산울타리 같은 풀들. 밤이 오면 향기를 발하는 풀들. 자극적인 수액을 내는 풀들. 독한 수액을 내는 풀들. 짙은 녹색, 에메랄드빛 녹색, 연두색, 은녹색, 동록색. 흐릿한 녹색, 환한 녹색. 오직 칙칙함과 결핍만을 연상시키는 풀들, 기운 없는 부드러운 풀들. 26.
거대오그롱트, 크보이나 덤불, 바바쿨리안, 셉탕트린, 공산주의자들의성녀, 불임여우, 알두스, 모브가르드, 슈그다, 일곱리걷기, 에페르니엘, 늙은포로, 사크브리유, 뤼스맹고트, 빠른출혈, 생트발리얀, 토끼주둥이발리얀, 바보딸기, 이글리차, 오딜리데푸앙, 그랑드오딜, 대머리격자, 칼브그리예트, 폐허활보자, 세련된귀부인, 르그리넬, 깃털달린죽은파, 환희의광녀, 비틀린싹, 예민가시덤불, 마즈다하르, 장엄한숨결, 순례자진흙코, 문둥이어미, 토르슈포티유, 떠돌이싸움, 방울모양당그, 빛의디아즈, 신성한디아즈, 방물장수테르바베르, 협곡테르바베르, 말랑기요트, 팔베네, 아슈랑, 작은영광의포로, 버드나무브네즈, 도망치는아씨, 마스카라트, 네시의미녀, 피튀텐, 두스리외즈, 자정의잔느, 가짜독보리, 웃는뿌리, 로부시카, 솔리벤, 암캐양털, 도로글로스, 로부시카뒤사바티에, 깡패종자솔리벤, 향기나는솔리벤. 전부나무, 토르펠리안, 저주받은풀, 솔페부트, 가르브비앙드르, 헛회전, 울브바이안, 그랭두아제유, 우르퐁주, 영원한바보, 도랑의목쉰소리, 타타르처녀. 15, 18, 20, 21, 29, 33, 373.
풀의 이름을 천천히 호명하다 보면 지상에 존재하지 않는 이 풀이 만드는 낯선 경관 속으로 들어간다. 이 풀들은 화본과 식물과 야생 풀의 명명법을 연구하는 그의 아내가 붙였거나 그녀로부터 배운 그가 붙인 이름이다. 여기에 두 가지 추측이 가능하다. 방사능 낙진으로 풀은 모두 변이가 일어나 새로운 풀에 명명이 필요했거나 이전의 지식 체계가 무너져 새로운 명명 체계의 필요로 다시 이름 지어졌거나. 있음직하지 않은 두 번째 이유는 포스트엑조티시즘 세계 안에서 기존의 문학 장르는 사라지고 소설, 나라, 로망스, 샤가, 노호와 같은 문학 형식이 나타난 것에서 유추한다. 사실은 어느 것도 확실하지 않다. 경관의 관점에서 그것이 무엇이었든 스텝이라고 하는 야생 풀과 볏과 식물이 만든 초지가 넓게 펼쳐진 일반적인 풍경이 이러한 낯선 풀로 이뤄진 낯선 스텝, 형상은 비슷하나 내용은 다른 경관이 되었다. 경관이 시각적인 것만을 뜻하지 않고 감각하는 모든 것으로 이루어진다 할 때 풀들에 대한 긴 서술에서 알 수 있듯 이 스텝은 다른 감촉, 다른 빛깔, 다른 내음, 다른 질감, 다른 밀도를 가진 경관이다. 인간의 접근을 한사코 거부하고 있는 적대적 스텝은 인간이 저지른 행위를 고스란히 다시 인간에게 돌려주는 듯하다. 공백구역에 들어온 지 스물아홉 날, 풀은 변이를 통해 살아남았지만, 그들은 왼통 초지로 바뀐 붉은 별 소프호스를 마주하고 죽어가고 있었다.
^ 그는 오래된 숲 | 찬란한 종착역 콜호스로 들어간다
오래된 숲. 머리 위로 하늘은 한 조각도 보이지 않는다. 검은 나뭇가지로 이뤄진 불투명한 장막들. 두텁고 묵직하고 움직이지 않는 직물. 강렬한 냄새. 낙엽송. 전나무, 이끼, 양치류, 나뭇진, 썩은 물이끼, 부패 중인 나무, 늪지의 가스. 땅 속 깊숙한 곳에서부터 올라오는 악취 나는 김. 나무껍질 향, 나무껍질 아래 고인 점액의 냄새, 유충들의 꿉꿉한 냄새. 버섯. 축축한 그루터기. 꾀꼬리버섯, 말불버섯, 작은회색버섯, 끈적버섯, 괴물같이 모여 있는 원숭이의자버섯, 소혀버섯, 거대한 싸리버섯, 가지 많은 이빨버섯. 구름버섯 가장자리의 악취나는 수액. 무엇으로도 깨지지 않는 강렬한 정적. 58, 72.
오래된 숲은 다른 곳과 같은 속세의 장소가 아니다. 보통 규모의 다른 숲에도, 한 없이 넓고 사람들이 죽는 타이가에도 여기에 비견할 만한 장소는 없다. 끔직하게 길고 위험한 길을 거치지 않는 한, 레바니도보와 그곳의 '찬란한 종착역' 콜호스에 도달하려면 숲을 가로지르는 수밖에 없다. 하지만 숲을 가로지른다는 것은 숲의 적대적인 나무들 아래를 헤맨다는 것, 아무런 지표도 없이, 맹목적으로 나간다는 것, 기묘한 함정들 한복판을 힘겹게, 한정 없는 시간 동안 걸어간다는 것, 또한 곧장 나아가면서도 빙빙 도는 것, 마치 중독된 것처럼, 약에 취한 것처럼, 힘겹게 헐떡이며, 마치 스스로의 코 고는 소리와 신음 소리를 들으면서 결코 깨어나지 못하는 악몽 속에서처럼, 또한 어디에서 오는지 알 수도 없는 두려움에 짓눌리는 것, 또한 정적만큼이나 소리를 두려워하는 것, 또한 판단력을 상실하고, 결국 소리도 정적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오래된 숲 한가운데 있다는 것은 더 이상 피로를 느끼지 못한다는 것, 삶과 죽음 사이를 떠도는 것, 무호흡과 헐떡임 사이, 잠과 각성 사이에 걸려 있는 것. 73.
작은 촌락 레바니도보, 중심 도로가 있고 콜호스 시설과 농장은 흙길로 연결된다. 중심부에 집들이 길을 마주하고 늘어서 있고 마을은 들판과 숲의 초록으로 둘러싸여 있다. 대형건물 하나, 작은 발전소의 불타는 잔해 위에 지어진 창고, 방사능 폐기물을 보관하고 처리하며 미쳐 날뛰던 원자로가 파고든 수직갱이 있다. 우드굴 할머니는 이 수직갱과 대화를 나눈다. 34, 82.
스텝과 타이가 사이, 초지와 숲 사이 오래된 숲은 찬란한 종착역 콜호스를 장막처럼 둘러싸고 있다. 볼셰비키 샤먼과 마법사 후손인 콜호스의 수장 솔로비예이가 타이가에 마법을 걸어놓은 오래된 숲은 레바니도보와 하나의 공간이며 그의 의식이 확장된 공간으로 의식 자체다. 이 숲을 통과해야 우리는 볼로딘이 그리는 이야기로 들어갈 수 있고 현실과 환각, 의식과 무의식, 죽음과 죽지 못하는 중음中陰의 삶 속으로 들어갈 수 있다. 그래서 오래된 숲은 물리적인 숲인 동시에 관념의 숲이다. 이 숲으로부터 비롯된 풍경, 하나의 풍경이 하나의 관념이 된다는 것은 무엇인가. 소설과 상관없이 에드워드 호퍼edward hopper의 그림이나 가브리엘레 바질리코gabriele basilico의 사진이 얘기하는 풍경의 전언을 어쩔 수 없이 함께 듣는다. 그러나 무엇보다 김윤식이 '동양정신과의 감각적 만남'에서 그려낸 안평대군과 안견의 '몽유도원도'가 담고 있는 유토피아가 작동하는 방식과 그 정반대의 디스토피아가 되어버린 '오래된 숲'이 그려내는 세계. 그냥 이미지가 이미지를 부르는 자유연상이다. 하나의 풍경은 어떻게 하나의 관념이 될 수 있는가. 볼로딘은 마법이라 간단하게 말했지만, 거기에 긴 설명과 새로운 명명, 자연을 대하는 인간 행위의 한계가 만들어낸 필연적 결과가 촘촘히 쌓여 마법이 완성된다. 우주목으로 당산나무가 가진 마법도 그러한 것이 아닐까. 물론 이 경우는 자연을 대하는 정반대의 태도에서 비롯되었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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